작가 성민우의 근작을 중심으로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코우로스, 그리고 코레

홍경한(미술평론가)


작가 성민우의 근작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기록하는 차원을 이탈한다. 그의 근작은 자연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기 보단 오히려 사실성이 사라지고 난 후의 존재의 실체를 탐구해 가는 과정에 가깝고, 내용적으론 소멸의 재생에 관한 서사까지 함유한다.1)

그의 신작 중 일부는 평범한 풍경(식물 혹은 숲)이 아니라 오이코스(Oikos)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시간’에 대한 시선이며, 이 시선은 ‘중첩과 누적’이라는 조형방식 아래 드러나는 ‘존재의식’에 관한 서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중첩과 누적’을 통해 빚어지는 시간은 성민우에게 있어 조형의 절대적 알고리즘이다. 이것은 일종의 시간의 레이어로 이뤄지는데, 시간을 포갠 결과에 따라 작품에 부여된 기존 인식은 해체되고 새로운 무형의 이미지가 탄생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이미지 속에 다시 주름을 편 공간이 자리를 잡는다. 지난 16년 간 이어온 그의 거의 모든 작업이 이러한 맥락을 지닌다.2)

대표적인 작품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2018)이다. 120호 정도의 평면 6개를 이어붙인 이 대형 작업은 사계를 지나 새롭게 태어난 다섯 번째 계절, 그 순환-연속성에 있으나, 무엇보다 엄청난 노동력을 가늠하게 한다. 8미터에 달하는 크기도 그렇지만, (작가의 말에 의하면) ‘흔한 풀’로 빈틈없이 메워진 화면자체가 짙은 물리적 공력의 투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업의 실체는 (앞서도 언급했듯)‘나’와 근접한 일상 속 사물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첩(疊)해 중층을 이루거나 순차적으로 미끄러지듯 놓이는 가운데 나타나는 ‘존재의 의식’에 방점을 둔다. 다시 말해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항상 ‘흔한 풀’들의 곁을 지나고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애초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흔한 풀’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며, 즉자존재의 당위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자기관계가 아닌 존재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며, 단적으로 긍정성으로 그 자체인 것이라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존재론에 부합한다. 여기엔 긍정도 부정도, 능동과 수동도 없다.

성민우의 작업에 ‘흔한 풀’이 자주 언급되는 까닭에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지만, 사실상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흔한 풀’이 아니다. 그 보단 이미 존재해왔고 존재해가고 있는 존재인 ‘흔한 풀’에 대한 성민우의 시선, ‘존재의 의식’을 ‘시간의 중첩’으로 전이하는 작가의 미적 태도3),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미물과 관계 맺고 소통하며, 그것에서 영감 받으며 어떤 의미를 재구성하는 작가의 의지작용이 핵심이다.4)

콕 집어 거론하진 않고 있으나 성민우의 작가노트를 보면 그 역시 같은 흐름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흔한 풀’에 대해 “우리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은 계절의 색깔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계절의 색깔은 시공의 대치어이며, 자연의 부분인 ‘흔한 풀’은 작가에게 이르러 특정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 또한 주어는 ‘매개’5)인 ‘흔한 풀’이 아니라 시공과 존재이다.6)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의 경우 시각적 측면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시간과 공간의 순환으로부터 시작되어 비결과적인 풍경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내적으론 기록의 병첩(竝疊)을 거쳐 리얼리티를 상정하고 (결과론적으로)상상력을 자극하는 수순을 밟는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서 확인 가능하듯)어찌 보면 지상적인 우연성(혹은 미필적 필연성)과의 결합 속에서 위치를 결정하는 방식7)을 지닌다 해도 무리는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을 따로 떼어 해석하자면, 반복되는 시간을 ‘과정의 집합’ 아래 복원하는 것이자, 너무나 익숙해 발견되지 못한 것의 발견을 통해 작가 자신의 삶의 지층을 덮고 있는 현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8) 또 다른 관점에서 ‘과정의 집합’은 전달해야 할 것과 전달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들의 지속이기도 하다.9) 그것은 생태이고 자연과의 공생이며 시공이 전부일 수도 있다. 이처럼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 규정되는 작품이라 하기 어렵다.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함께 갤러리도스 초대전에 선보이는 또 다른 작품 <오이코스_코우로스(kouros)>(2018)와 <오이코스_코레(kore)>(2018)10)는 단순하고 묘한 형상과 복잡한 배경, 배경과 인체를 구분하는 붉은 선11)으로 인한 이질감이 눈에 띈다. 금박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를 을씨년스러움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필자는 어쩐 일인지 죽음을 연상하기도 했다) 면에선 되레 기존 작품들을 앞선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일단 묘사의 단계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표현으로의 전이를 가늠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물리적 상황을 응집해 새로운 공간성과 시간성을 합치시키는 조형어법이 상당히 세련되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 배경에 놓인 이미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에 따르면 <오이코스_코우로스>와 <오이코스_코레>의 여백을 차지하고 있는 ‘흔한 풀’은 겨울의 ‘쑥’과 한해살이 풀 ‘도깨비바늘’이다.

삐죽삐죽 가시 털을 한 ‘도깨비바늘’과 냉랭한 느낌의 겨울 ‘쑥’, 직립의 황금빛 인물들은 상당히 이색적이면서 부조화롭다. 더구나 이 작품은 금빛 비단 위 수묵드로잉(정확히는 전통적인 이금(泥金)기법을 변용한 채색화)으로, 한낱 풀에게는 과분할 만큼의 공을 들였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이 숲의 전령이거나 메신저 혹은 생장과 번식을 관장하는 자연의 수호자 및 경외자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하찮고 흔한 존재로 여겨지는 풀에게 금빛 존재감을 부여하려한 처음의 의도처럼 순금박의 금속성 표면과 그 사이를 흐르는 선명하고 붉은 선을 가진 인간형상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풀과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주고자 한다.”며 “아주 오래전 과거 인간들이 신전 앞에 인간의 형상을 세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풀숲 앞에 금빛으로 빛나는 인간의 형상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는 많은 부분 닮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풀과 인간의 관계성, 확대할 경우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이다. 때문에 이 작품들에는 인공성이 두드러지는 현실에서 자연성과 인간의 상호성을 되묻고, 생명의 본질, 자연생태와 인공생태, 환경윤리와 생태윤리라는 명제가 이입되어 있다. 생물이거나 무생물이거나, 물질이거나 비물질이거나,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독립적이거나 종합적이거나, 형식이거나 본연에 관한 것이거나 어쨌든 그 모든 것은 관계 맺고 영향을 주고받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삶의 형식’을 규정하는 명사들이요, 뿌리칠 수 없는 ‘인간 삶의 조건들’이다. 작가의 의도가 배어 있던 그렇지 않던, <오이코스_코우로스>와 <오이코스_코레>는 인간 삶의 형식과 조건이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어쩌면 보잘 것 없는 겨울 풀로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영원불멸한 순금으로 지속-지켜가야 할 순환과 생명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12)

하나, 이들 작품은 무언가로의 본질과 회귀, 포용의 미학을 예술언어로 끌어내어 서술한다. 그 서술엔 문명 속에서 자가발전을 거듭해온 인위적 환경을 뒤로 물린 채 타자 간 거리감을 상쇄하고 갈등과 대립보단 치유와 화합의 단어들이 녹아있다. 이를 삶의 방식에 관한 작가만의 소고라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렇게 성민우의 근작들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환경,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주의를 쉼 없이 오가며 우리에게 하찮고 별 것 아닌 것과의 교감을 통한 관계와 존재의 의식이라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물론 “종교적 이상을 표현하던 금빛의 사용이 풀이라는 하찮은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불화나 불상에 사용되던 순금박을 고대서양의 조각상 형태를 빌어 표현함으로서 시대적 시간적 간극의 초월까지 담고 있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을 특정함으로 인식하나 실은 광범위한 연계(連繫) 위에 존재한다. 멀리 보면 작가 성민우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동일하다. 시공의 중첩과 결에 의해 만들어진 시공의 콜라주를 통해 다차원적인 시간성, 시간성으로 인해 희석되어버린 자연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되뇐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현재의 작업을 보면 그 방식의 결을 잘 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거 일부 작업에서 엿보이던 신체와 풀의 부조화이다. 비교적 옛 작품에 포함되지만 어떤 경우엔 다소 설명적이라 작금의 작업과 구분되는 탓이다. 예를 들어 2005년 <풀의 초상> 및 <금빛 풍경> 연작은 지금 작업의 밑동이 되었고, 2008년 <보살과 나한>은 10년 뒤 그려진 <오이코스_코우로스>와 <오이코스_코레>의 단계를 보여준다. 특히 2016년 그림손갤러리 기획 초대전에 출품된 대형 작품 <오이코스>와 <오이코스_시(時)>, <오이코스_공(空)> 연작은 현재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다만 2013년 <초상>과 2015년 <에콜로지> 전에 선보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손>, <메꽃>, <고들빼기>, <환상과 망초> 등의 작품은 풀을 통해 사람을 보고, 생명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해답으로 여기기엔 오늘의 작업 대비 직접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민, 사회적 관계, 욕망 등을 담았다고는 해도 표현 또한 작위적이고, 일종의 직관작용에 앞서 계산적, 의도적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듯한 여운을 떨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다. 빈약한 텍스트에 불필요한 주석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형국이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익명의 취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의 적당한 조율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지난 2003년 첫 개인전 이후 과거의 작업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한 듯, 적절하고 효과적인 형식을 도려낸 작업들이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오이코스_코우로스>, <오이코스_코레>처럼 설명은 함축으로 변화했고, 표현은 꽤나 자유로워졌다. 적어도 <오이코스_코우로스>와 <오이코스_코레>는 보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시각에서 사유로 전환되고 있음을 파악하게 한다.

향후 어떻게 이어갈지 그 선택의 지혜로움이 요구되지만 적어도 이들 작업은 작가가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이자, 실질적 도약의 결과물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그만큼 가치도 유효하다. 이것이 그의 여타 출품작인 <오이코스_부케>(2019) 시리즈 및 <오이코스_숲>(2019) 작품에 대한 해석을 억누른 채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오이코스_코우로스>, <오이코스_코레>에 집중한 이유이다.


1) 이는 달리 말해 객관적 묘사에 주관적 덧칠을 통해 회화의 재현기능을 되살리고 가시적 실체와 시간의 층위를 접합시킴으로서 각각의 특질을 존재화 한다. 이는 회화가 ‘스스로 예술화’되는 단계를 명료히 드러내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것의 모방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 촉발시킴을 넘어 인식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업이랄 수 있다.

2)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 평평한 질감, 세밀한 묘사는 일상 풍경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의 기술일 뿐, 성민우 식의 방법론의 전부라고 보긴 어렵다. 사실상 이미지의 기술은 여러 층위에 놓인 물리적 간극과 고유한 내러티브에 관한 효과적인 장치에 머문다.

3) 미적 태도는 대상에 주목하거나 표현함으로써 이미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를 포함한 창작 시의 정신 태도이면서 동시에 미적 체험의 전제조건이다.

4) 경우는 다르지만 이는 마치 디터 로트(Dieter Roth)가 <솔로장면>(1997-98)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설치 작업에서 분류와 순서, 정리의 과정을 덧씌우는 작업으로 ‘영감을 주는 것에 대한 자유분방함’을 드러냈듯,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에서의 어지럽게 자란 식물들과 자잘하고도 복잡하게 얽힌 ‘흔한 풀’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자연물과 풍경을 교차-반복적으로 포개면서 함축된 시간의 계층을 느낄 수 있다.

5) 작가는 지난 2014년 개최된 모리스갤러리 전시 글에서 “나의 풀들은 자연과 인간 혹은 자연과 인간의 몸을 하나로 보는 생태학으로 이해되고 있다.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말라죽기까지의 일 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흔한 일년생 풀들은 나의 삶을, 인간의 삶을 대변해 주는 적극적인 매개체가 되어 주고 있다.”고 적었다.

6) 이들은 분명 순환적 순차적 나열을 하고 있고, 언뜻 풍경의 변화를 화폭에 중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축적된 풍경,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가 이뤄지고 있음을 배척하기 어렵다.

7) 성민우의 이미지들은 삶에 주어진 시간을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에서 일상에서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판단으로 미끄러지듯 연계되었고, 이러한 과정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방식을 만들어냈다.

8) 현재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 존재성을 위시한 고독함, 외로움 등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9) 이와 관련해 작가는 “싹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은 뒤 자신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려놓는 가을을 지나면 모든 생명체들에게 조용한 겨울의 시간이 온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디 즈음의 시간과 공간에는 조금은 일찍 발화하거나 뒤늦게 열매를 맺는 등의 삶이 또한 존재하고 있다. 자잘한 씨앗들이 겨울을 나는 동안 그들의 생존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다. 꼿꼿하게 말라버린 미라의 형상처럼 그러나 강건한 삶의 형태처럼 풀의 겨울 즈음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디선가는 새로운 봄이 움트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고 부언했다.

10) 이 두 작품은 <오이코스_다섯 번째 계절>과 견줘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고 세밀함의 정도 역시 낮으나, 주목도는 반비례하는 특징을 지닌다.

11) 작가는 “이러한 색과 표현은 불교가 중심이 된 고려시대 많이 그려진 변상도의 방식을 차용하고 변용하였다. 불교경전을 장식하기 위해 감색으로 감싸진 경전의 앞뒤에 섬세한 금색으로 불교의 이상향을 그려 넣었던 것이 변상도다.”라고 설명한다.

12) 작가의 언급은 없으나 필자의 판단에 그의 작품엔 인간중심주의에서의 자연도 고찰한다. 우린 통상 환경을 말하면서도 인간중심주의에 의한 환경임을 간과한다. 때문에 자연은 주변으로 설정된다. 다시 말해 자연이란 단어는 인간의 우월의식이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에 의한 의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자연에 그친다는 것이다.



 
 



성민우의 ‘자연의 신체’와 ‘오이코스’ 세계

 

 

성민우가 그리는 풀은 자유로운 붓질의 호기와 묘사의 정동을 품었다.

다소 낯선 언어인 ‘오이코스’는 풀의 중추인 맥(脈)을 그린다.

그리스어 ‘에코’(echo)의 파생형이자 ‘말을 전달한다’는 뜻의 오이코스는 그리스 신화, 자연학, 그리고 의학을 가로질렀다.

신화 속 ‘메아리’를 인격화한 에코가 자연 현상과 인체의 상태를 형용하는 언어 활용으로 탈바꿈 한 것은 세계의 모든 것에 활기를 부여한 그리스인의 지혜 덕분이다

지구상의 시·공간을 차지하는 무엇이 다른 무엇을 덮치고 빼앗아 점령한다는 의미는 ‘에코가 왔다’ 혹은 ‘에코가 갔다’는 표현으로 자연 현상을 함축한다.

예외 없이 이들은 인체에 “건강의 환영”(illusion of health)과 “죽음의 환영”(illusion of death)을 몰고 온다.

건강한 신체의 단단하고 항구적인 특성과 일상생활을 천천히 또는 갑작스럽게 변화시키는 에코의 존재는 자신의 출현과 출몰을 알리기 위해 색채와 형태로 ‘신호’(sign)한다

식물의 신체보다 더 큰 보이지 않는 자연의 흐름을 통해 전달하는 에코는 시간의 흐름에서 앞서 존재하는 ‘전령’이 되었다.

현상을 기준으로 전.후의 시간 간극을 알리는 성민우의 ‘오이코스’는 현상과 시간이 짝을 이루어 무엇인가를 알리는 유의미한 존재다.

 

작가의 지혜는 오이코스의 세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자연과 사회를 잇는다. 빛과 공기, 흙과 물의 존재가 떠받치는 풀의 신체는 지구상의 존재들이 생명이 트고 자라나는 생장의 사건을 품고 있다.

생명의 흐름을 어지럽고 아찔하게 유동치는 줄기와 풀의 신체는 작가의 『일년생』(2014)을 지나며 한층 성숙해졌고 작가의 말처럼 “만만하고 가까이 있고 언제나 충분하게” 넘치는 풀들은 자연의 거울과 사회의 거울을 비추는 존재들이다

방동사니, 그령, 쑥부쟁이, 돼지풀, 방가지똥, 달개비 같은 일년생 풀살이가 삐죽삐죽 솟구치고, 잎맥의 붉은 혈류들의 약진과 행진은 장미, 백합, 튤립 같은 꽃들의 기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얽히고설켜 무리 짓는 풀들의 엉김, 입에서 입으로 떠다니는 부표 같은 이름의 풀들에 성민우는 연약하나 꾸밈에 호소하지 않은 존재감을 부여한다.

덩굴가지의 내달림이 깊은 바다 파랑의 표면을 뚫고 화산처럼 솟구치고, 사랑의 인체로 나아가 뻗치고 모여서 신부의 부케가 된다.

자신을 발산하고 확산하는 풀의 신체는 ‘닮음’을 따라 서로 서로를 휘감으며 갈등조차 부드럽다.

 

나아가 풀의 신체는 뿌리 아래에서 자연 발생의 ‘연기’(緣起:생기 소멸하는 법칙)와 ‘인연’을 쌓는다.

끝을 알 수 없이 깊어지는 대지의 속살이 되는 풀의 뿌리는 하나가 다수로 다시 다수가 하나로 이어지는 적응과 협력을 펼친다.

자연의 적응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대조하는 작가의 시선은 지구 곳곳에서 자연의 죽음을 전달하는 에코의 귀환을 막아서며 인간을 치유하는 자연의 존재를 역설한다.

성민우의 오이코스의 세계는 자연의 본성을 추대한다. 연두, 분홍, 노랑, 녹색, 청록, 황토를 실은 사계절의 전령이 옷가지를 바꾸어도 뿌리의 힘이 기약하는 재건과 회복을.




 
 



생성하는 오이코스

 

허나영(미술비평)

 

아침에 일어나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하루를 보낸 후 잠이 들 때 까지, 우리는 수없는 ‘관계’ 속을 지난다.

나와 가족 간의 관계나 사회 속의 관계 뿐 아니라, 출근 버스 안에서 옷깃을 스친 사람이나 눈인사를 주고받는 행인과도 관계라는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

비단 사람만 그럴까? 현관문이 열릴 때 맡은 알싸한 바람, 흔들리는 가로수의 잎사귀 그리고 힘겹게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나온 풀과도 마주친다.

그저 가을의 단풍에 감상이 젖어서 일수도 있지만, 종교나 과학의 관점에서도 우리는 관계망 속 한 점이다. 성민우의 풀들 역시 화폭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생태

성민우는 풀과 인간을 ‘관계의 생태’로 묶는다. 인간 간의 관계가 있듯, 풀들도 서로를 의지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마치 핏줄과도 같은 잎맥으로 작품 속에서 표현된다.

그저 한 존재만은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야만 하는 관계로 이루어지는 생태이다.

인간이 온전히 혼자일 수 없듯이, 풀들 역시 척박한 땅에서 움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의지해야 할지 모른다.

이러한 생태의 무리를 성민우는 오이코스라 이름 붙였다.


오이코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공적인 영역인 폴리스에 대비되는 개인적인 집단을 지칭하던 말이다.

이후 이 단어는 주로 종교적인 무리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성민우가 말하는 오이코스는 비록 피를 나누거나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도 서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의지하는 풀 무리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풀 무리는 인간의 무리를 의미하기도 하다.

아이가 어미에게 의지하듯, 그리고 친구와 모여 수다를 떨 듯 인간은 친밀하고도 내 인생을 걸만한 인간 무리를 갖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척박한 아스팔트 한 귀퉁이,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풀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나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렇게 성민우에게 풀은 한낱 미물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는 생명이다.

 

시(時)와 공(空)

다시 말해 이 작품 속 풀들은 일반적인 선입견 속 풀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민중이나 인간의 실존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거대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우리가 하찮게 무시해버릴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화폭의 풀들은 저마다의 특성을 드러내며 금빛으로 화려하게 빛난다.

그리고 풀은 그 하나로 생명이기도 하고 서로 모여 생명의 그물을 만들어나가는 오이코스 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민우는 풀의 오이코스에 시간과 공간을 부여했다.

 


다사다난했던 2016년을 마무리하는 겨울의 전시에 걸린 풀들은 같은 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풀들이다.

숱한 풀을 그리고 그 이름과 생태를 줄줄 읊을 정도로 준전문가이지만, 성민우는 절대 풀의 형태를 외워서 그리지 않는다.

오가면서 보게 되는 풀들을 직접 모아서 그 시간을 살고 있는 풀을 그리는 것이다.

오이코스-시(時)> 속 달맞이는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 돌보는 이가 없어 물이 부족해서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부족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힘든 시간을 꿋꿋이 버텨낸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달맞이는 성민우의 작품 속에서 금빛을 발하여 굳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오직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생명이 존재하는 풀들을 그 시간 속에서 담아낸다.

그저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흡사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같은 <오이코스-시(時)> 속 달과 해는 화면의 양쪽에 놓여 오이코스 속 시간을 대변해준다.


또한 오이코스는 공간을 이루기도 한다. 가족을 ‘집’이라는 공간으로 표현하듯, 풀들 역시 자신의 공간을 가진다.

하지만 그 공간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소이다.

우리의 발 바로 아래이기도 하고, 폐가의 한 귀퉁이이기도 하며 고속도로변 척박한 땅뙈기이기도 하다.

오이코스-공(空)> 속 붉은 줄기의 환삼덩굴은 귀화식물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지만 그 질긴 생명력 때문에, 그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라기 힘든 땅에서 그 뿌리를 내린다.

그 생명력을 성민우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줄기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해내었다.

그리고 함께 공간을 메우는 메꽃, 달맞이꽃, 쇠무릎, 고들빼기, 달개비 등의 풀들은 저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오이코스의 시간과 공간은 풀들이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이 말이다.

이렇듯 성민우는 풀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삶의 시기에 따라 힘들기도 하고 평안하기도 하며, 그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무리에서 떨쳐 내버리기도 하는 우리의 인생과 사회의 모습을 말이다.

작가는 풀들이 저마다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생명을 이어나가듯, 인간 역시 저마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 그 누구를 짓밟거나 폄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생성하는 오이코스...

풀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 누구보다 끈끈한 소통을 하게하고, 작가가 화폭에서 풀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듯이 풀 역시 화폭에서 자신의 오이코스를 이뤄달라고 작가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그렇게 동산이 만들어지고, 숲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민우의 오이코스는 진행 중이다.


겨울이 오고 풀들이 저마다 자신의 뿌리를 땅 속에 감춘 채 다음 봄 햇살을 위해 생명력을 응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다시 땅 위로 올라와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씨를 뿌릴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생명을 가진 풀의 생태처럼 성민우의 오이코스는 계속 변화해나갈 것이다.

첫 오이코스는 붉은 생명의 혈관을 가진 풀들이었지만, 점차 오이코스들은 풀 본연의 색을 가지며 금빛 선으로 포개어졌다.

그리고 이제 작가는 그 풀들의 단단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금박을 입힌다. 금박이 주는 단단한 금속성의 면은 남겨진 잎맥과 줄기를 강조하게 된다.

금빛 선으로 표현된 잎에서 주는 풀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그 생명이 흐르는 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새로운 표현적 시도를 통해, 성민우가 만들어낸 오이코스가 완성된 하나의 세계가 아니며, 생성 중인 다양한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붉은 힘줄이 밀집되어 에너지가 응집된 풀의 오이코스이기도 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잔잔한 세계이기도 하며, 해와 달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기도 하다.

또한 벌레와 어우러져있는 동산이 되기도 풀의 잎맥이 단단한 금속면과 부딪히며 만드는 숲이기도 하다.

이렇듯 성민우의 오이코스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 다음을 또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오이코스 속에서 어쩌면 길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든다.

아름답게 분장된 풀들이 다음 오이코스에서는 어떠한 모습일지 기대와 걱정이 함께 드는 건, 아마도 우리의 인생 역시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오이코스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가지듯 다음의 오이코스를 기다려보면 어떨까.

 


 Creating Oikos

 

Art Critic, HUR Nayoung

 

I go through a lot of “relationships” from waking up in the morning with seeing the sunlight to falling asleep after whole day. I am connected by nets of relationships not only with my family and society but also with any passenger to meet in the commute bus. Is it only for human being? I sometimes faced with piquant winds as front door opening, leaves of shaky trees, and grasses between paving blocks. I can know to be a point in the relationship network on the viewpoints of religion or science. SUNG Min Woo’s grasses have faced with each other on her canvas.

 

Ecology

SUNG Min Woo binds grasses and human beings with “relationship ecology.” The grass relies on each other like human being. The relationship appears in her works with leaf vein like human. Because one being is hard to sustain its life, they should be closely related for themselves. As humans cannot be totally alone, the grasses should rely on each other to survive for themselves in the harsh land. SUNG Min Woo called this ecological herd “Oikos.”

The oikos refers to an individual group in contrast to the public domain, the Polis, in ancient Greece. Since then, the word has become a name primarily referring to religious herds. The “Oikos,” SUNG Min Woo saying, is a grass herd to survive the grasses each other with emotionally connecting by themselves even they have individual lives. As the child relies on her mother and the friends are gathering and chatting, the human beings have kept their herds friendly and valuable to bet their lives. They look like the grasses to keep their lives together in any cramped space or on a corner of stark asphalt. The gasses are not worthless organisms, but herds to keep their lives for her.

 

Time & Space

 


The grasses in her works are not the usual grasses. However, they do not represent a great people or a human existence. It is not a tremendous story, but it is also not something we can ignore. The grasses in her canvas shine brilliantly golden light with their characteristics. The grass can be a life by itself and an oikos by creating life network together. Therefore SUNG Min Woo gave the time and the space to the grass oikos.

Itis at the end of this year, winter of 2016. The grasses in her works come from the spring, summer, and fall of this year. She does not never draw the grass in her memory even she is one of semi-specialists of the grasses. She has collected and drawn the grasses within near her space, which have been living the time. The dal-ma-ji in the “Oikos-time” could not blossom with lack of rains in this especially hot summer. It is not lacking in appearance, but surprising to survive during this hot summer. The dal-ma-ji shines the golden light and keeps its position in her works. The time has been kept with the lives of the grasses during drawing this work. The sun and moon in the left and right of “Oikos-time” like il-wol-o-ag-do have represented the time of the oikos.

The oikos can be a space. The grasses have their own spaces like the family expressed as “house” space. The oikos space is a place we have not thought of yet: below my foot; any corner of deserted houses; stark and small land by streets. The hwan-sam-deong-gul in the “Oikos-space” is one of the most notorious naturalized plants. Therefore it just takes its roots off the hard-to-grow ground where people cannot reach with its strong vitality. The vitality has been shown as a figure of alive stems by SUNG Min Woo. There are many grasses in the space and they made their own world looking away from the blue sky, who are me-kkoch, dal-ma-ji-kkoch, soe-mu-leup, go-deul-ppae-gi, dal-gae-bi, etc. The oikos time and space show that the grasses have life. SUNG Min Woo sees the human figures from the grasses in this way: it is hard and peaceful according to the time of life; it is to throw someone away from the herd because it is just different. She has a question why don’t human beings live without trampling or disparaging anyone according to their own circumstances, like the grasses live their lives according to their given circumstances.

 


 

and Creating Oikos

Artist's affection for the grasses is to make communication between the artist and the grasses. It seems that the grasses are asking the artist to make their oikos in her works like the artist gives new lives to the grasses. With this way the garden was created and the forest was created also. However, SUNG Min Woo’s oikos is on-going now.

Winter is coming and the grasses are concentrating their vitality hiding their roots in the ground until next spring with warm shining. These lives will come up again on the earth, with leaves, flowers, and seeds. SUNG Min Woo’s oikos will be continuously moved like the ecology of the grasses with endless their lives. Her first oikos is the herd of grasses with red vein for their lives. The next is for the grasses to have their own colors and golden light. And then, the strength of the grasses is enhanced with covering by gold foils. The gold foil covered leaf side except its vein and stem. However, the metal characteristics of gold foils can enhance the leaf veins and stems. Through this new approach I can see SUNG Min Woo’s activities and know that now is not the completion of her oikos, one of her intermediates created by herself.

SUNG Min Woo’s oikos can be the grass oikos with energy-concentrated red veins, the peaceful world looking at the blue sky, the inside of time with the sun and moon, the garden with a worm, or the forest made of the leaves faced with metal surface. I expect to see SUNG Min Woo’s next works because her works are on-going and progressive now. But sometimes I have feeling with worries of what I stay in the oikos and lose the way further. What I have expectation and worry to see the grasses in her oikos is that life of human being is located on the uncertainty by herself. Why don’t you have a waiting for the next her oikos like exciting in the future coming soon?




 
 




바닥에서 빛나는 풀, 그리고 삶

허나영

 

나에게 있어 풀은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고 싶고

그들을 연민하고

그들을 담고 싶은

그런 대상이었다.

-작가 노트 중-

 

어둠 속에서 자란 풀

검은 바탕 속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풀. 그리고 풀로 만들어진 형상과 풍경. 그 어두운 단순성과 강렬한 복잡성의 대비는 우리를 화폭으로 끌어당긴다. 이 어둠 속에서 피어난 형상은 무얼까.

이 장소는 어디일까. 화폭으로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모호한 공간 속에 들어가게 된다.

힘차게 꿈틀거리는 붉은 곡선들과 초록, 노랑의 형형색색의 선들은 그림 속 형상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형상은 풀이다. 우리가 길가에서 매일 마주하는 풀 말이다.


길가 아스팔트를 뚫고 연석 사이를 비집고 나와 존재를 드러내는 풀, 소위 잡초라 불리는 이 풀들은 일상에서는 우리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간혹 민들레가 홀씨를 머금을 때가 궁금증이 잠시 스칠까?

이 내세울 만한 꽃도 향기도 없는 이 풀들을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누구도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움터 싹으로 줄기로 잎으로 자라난다.

그저 자신에게 간간히 주어지는 빗방울과 흙의 온기만으로 말이다.

그리곤 일 년도 채 나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돕는 이 없어도 스스로 생명을 움트는 풀의 자생력.

그러한 풀의 생태를 성민우는 검은 화폭에 담는다.


 

찬란한 금빛풀이 만든 인간의 삶, 그리고 관계

검은 바탕 위에 홀연히 드러난 풀의 모습은 가까이 다가 갈수록 마치 신기루처럼 보인다.

멀리서 보면 풀들은 명확하게 어떠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화폭에 가까이 갈수록 그 형상의 윤곽은 바탕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검은 색의 아래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금빛과 형상의 곳곳에 새겨진 금색 선들이 합쳐진다. 그 위에 붉은 잎맥과 푸른 잎들이 뻗어가고 있다.

화폭의 풀들은 분명 이름이 있는 것들이다.

여뀌, 냉이, 민들레, 왕고들빼기, 질경이, 큰방가지똥, 강아지풀, 환삼덩굴... 비록 잎맥의 붉은 색이 과장되기도 하고, 벌레가 먹은 잎도 있지만, 화폭 속 풀들은 분명 현실에 존재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풀들에서 성민우는 생명을 느꼈고 그 생태를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생명과 풀의 삶을 금빛 붓질로 한올한올 살려낸다.

 


그렇게 붉은 잎맥과 푸른 잎, 금빛 줄기들이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에 이끌려 형상을 만들어낸다.

폭포가 있는 신비한 풍경 속 덤불이었다가 하트모양이기도 하고 남녀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사진의 한 장면을 이루다가 이내 다시 풀숲이 된다.

이러한 형상들은 작가가 오랫동안 작업을 하면서 개인사적인 굴곡과 인생에 대한 고민 등을 작품에 담으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시기마다 작품마다 형상을 이루는 풀과 함께 의미를 가진다.

그 의미는 그저 전체적인 형상으로만 설명되는 것도, 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풀만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성민우는 일견 풀숲이나 하트라 볼 수 있는 형상 속에 숨은 또 다른 형상을 넣어두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한 번의 바라봄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화폭 속 형상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듯 하면서도 이내 사라지고, 못 찾을 듯 하면서도 빛에 따라 반짝임을 달리하는 금빛으로 다시 또 다른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함, 이를 성민우는 인간관계와 같다고 생각한다.

풀무더기들이 그저 자신들의 생태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고 뭉치고 갈라지듯이, 인간관계 역시 너무나 사랑하여 하나가 된듯하지만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간극을 가지게 된다.

가족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덩어리인 듯하지만, 제 각기 자신의 색을 가진 풀더미로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풀은 꽃을 피우고, 또 다른 풀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벌레에 먹히고 상처를 입는다.

이렇듯 알 수 없는 인간관계처럼,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명확하게 알 수 풀의 생태를 성민우는 그린다.

그리고 이러한 풀의 형상은 인간관계의 은유이기도 하면서 작가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성민우를 이를 초상(草像)이라 이름 짓는다. 어떤 사람의 인물형상을 말하는 초상(肖像)이 아닌, 풀의 형상인 것이다.

‘초상’이라는 동음이의어에서도 그러하듯, 성민우가 그린 초상은 인간의 모습이면서도 풀의 모습이기도 하다.

풀잎과 줄기가 얽혀서 만들어내는 인간의 모습. 그 모습은 사랑을 하기도 하고 한없이 외로워하기도 한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

개인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다. 마치 차가운 땅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싹을 틔운 풀이 우연히 만난 근방의 풀들과 어울려 살아가듯이 말이다.

이를 자연의 관점에서는 생태학(ecology)이고 인간의 관점에서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민우의 풀그림은 이 둘의 관점을 회화로 관통하고 있다. 지구상의 생명들이 그물망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는 인간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근본 개념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를 성민우는 최근작품에서 오이코스(Oikos)로 풀어낸다.


풀더미들이 이룬 오이코스는 더 이상 우리 발밑의 풀들이 아니다.

우리가 밟을 수 있는 미물이 아니다. 오이코스를 이룬 풀더미는 오히려 우리를 집어 삼킬 듯 군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자 자신의 위치를 갖는다. 화폭 속에서 저마다 앞으로 나오겠다며 아우성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어우러지고 있다.

오이코스는 생물학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공적 영역인 폴리스와 구분되는 사적인 집단을 일컫는 이 말은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기본단위인 가족을 포함한 정서적 그룹이기도 하다.

풀더미를 인간관계의 반영으로 표현한 성민우은 바로 이러한 풀의 오이코스를 그려내고 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생명

 


풀과 인간, 이는 성민우의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두 가지 코드이다.

이는 하나로 결합되기도 하고 또 따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마치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처럼 우리에게 오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성민우가 첫 개인전에서 비단에 나뭇가지를 그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나무가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른 나무가 그려진 반투명한 비단을 통해 사람이 보이길 바랐다. 성민우에게 있어 나무와 풀은 인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생태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몸이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성민우는 우리 주위를 감싸는 반짝이는 생명을 보았다.

그리고 그 생명의 그물 속에 작가 자신이 속해있음을 표현한다. 무수한 금빛 점으로, 풀잎 끝의 금빛 선으로 그리고 금빛 풀벌레로 말이다.

언젠가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가벼운 반짝임, 움직임을 가진 것들이지만 이는 길가의 풀도, 인간도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성민우는 “풀과 벌레의 삶이 가볍다고 여겨진다면 ... 나의 삶이 풀과 벌레 같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한 마음으로‘비단에 금분으로 풀을 그리는 한국화가 성민우’의 작품에서 우리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Plants Shining on Earth, and Life

Art Critic, HUR Nayoung

 

Plants

I want to gaze on their life

Understand their ways

Have compassion for them

And contain them

-from the Artist’s Note

 

Plants Growing in the Dark

Plants growing in the dark background deliver a strong force of life. Shapes and sceneries are created using plants. The contrast of the dark simplicity and intense complexity draws us closer to the canvas. What is this growing in the darkness? What is this place? We enter into an ambiguous place as we can closer to the canvas. The powerful red curves, and numerous lines of green and yellow tones convey the immense energy contained in the form found in the painting. However, this form is an illustration of plants. Plants that we encounter on the streets everyday.

Plants that grow between asphalt cracks and curbs; we often call them ‘weed.’ These weeds do not attract our attention in our daily lives. Maybe a dandelion holding its spores from time to time may stimulate our curiosity. These plants are neglected, but these plants sprout in darkness, opens their buds, grow stems and leaves. They grow only through the occasional raindrops and the warmth of the earth. And they disappear within a year. The natural growing strength of plants, they grow without the help of others. Artist SUNG Min Woo depicts the life of such plants on a black canvas.

 

Human Lives Created through Brilliant Golden Plants, and Relationships

The imagery of the sudden appearance of plants on the black canvas resembles a mirage, as you get closer. The plants take on clear forms and shape from a distance, but as you get closer, the contours of the shapes disappear into the background. Then, a glimpse of golden layers underneath the black background, as well as the golden outlines planted here and there come together, on top of which the reddish leaf veins and green leaves stretch out. The plants on the canvas have distinct names. Water pepper, shepherd’s purse, Indian lettuce, plantain, sonchus asper, foxtail, Japanese hop… the reddish leaf veins are somewhat exaggerated and there are leaves eaten by insects. Nonetheless, the plants seen on the canvas exist in reality, in the most humble places. Artist SUNG Min Woo felt life in these plants and observed its ecology. Then, she gave life to the vitality and lives of the plants with golden brush strokes.

 


In such a manner, the reddish leaf veins, green leaves, golden strokes come together to create shapes and forms driven by an unspeakable energy. The shapes and forms transform from a bush in the midst of a mystical scenery with a waterfall to a heart shape, and then to an image of a man and woman. Then, it forms an image of a family portrait, which then reverts to an image of a thicket. Such imagery was formed based on the artist’s personal struggles and hardships experienced through an extensive period of time. Thus, the plants that form various images bear different meanings depending on the time it was created. The meaning of each piece cannot be described or explained through the overall imagery itself, or the thicket that forms the images. Moreover, artist SUNG Min Woo embedded another image in the midst of what appears to be a grass thicket or a heart shaped thicket. It is why her work cannot be understood or interpreted through a quick glance. The shapes and forms on the canvas appear to illustrate a clear image, yet it faintly disappears. It appears to be ambiguous or vague, yet it forms another image according to the glimmering golden lines. SUNG Min Woo relates such ambiguity to human relationships.

Just as grass thickets come together and disperse according to its ecology, human relationships also appear to form unity based on love, but at the same time, it forms a gap between relationships that cannot be understood. This applies also to families. It appears to form a single organic body, but each member of a family bears a unique color. Some plants grow flowers, while other plants fail to defend themselves and are eaten by insects. SUNG Min Woo paints the unpredictable ecology of plants, similar to unpredictable human relationships, which seem to be interconnected while living independent lives. Also, such imagery of plants is a metaphor of human relationships, as well as a reflection of the artist herself.

SUNG Min Woo refers to this as ‘portraits of plants,’ not portraits of people. SUNG Min Woo’s portrait painting depict plants, but at the same time, they illustrate images of humans. An image of a person formed through leaves and leaf their veins. Such imagery conveys a sense of deep love, or unbearable loneliness at other times. It is one, yet two. It is an individual, yet a family. Just like a plant that grew on its own without the help of others from the cold earth to live among other plants in its surroundings. This could be referred to as ecology from an environmental perspective and social ecology from a human perspective. SUNG Min Woo’s plant portraits connect the two perspectives through dialogues based on the fundamental concept that all life forms on earth from a network, which also applies to human societies. SUNG Min Woo illustrates this idea through her recent work, ‘Oikos.’

The Oikos, which now forms a thicket, is no longer a plant that is stepped on everyday. It is no longer an insignificant life form. It now forms a thick swarm, as if threatening to engulf humanity. Yet, it each holds its position to maintain harmony. Oikos is also known as the root word of biology. It is also a word refers to an emotional group including the most basic biological unit known as family. SUNG Min Woo, who expressed human relationships in relation to plants, depicts an Oikos of plants.

 

Life Shining Golden

 


Plants and humans; these are two codes that repeatedly appear in the works of SUNG Min Woo. At times, they come together as on, while at others they separate. Also, like a beam of sunlight shining through tree branches, they reveal themselves and also disappear. This aspect is also true in SUNG Min Woo’s early works when she painted tree branches on silk for first solo exhibition. There was more than just a tree painted using traditional techniques. She hoped that the audience could see people through the semi-transparent silk with the painting of a tree. For SUNG Min Woo, trees and plants are synonymous with humans. We, too, vaguely understand what that means. It is why humanity is becoming more and more connected about environmental issues because humanity is experiencing physical effects of the fact that this world that we live in cannot be sustained based on human relationship alone. SUNG Min Woo discovered shining life that surround us. She expresses that she, herself, is a part of the network of life using illustrations of countless golden dots, golden lines outlining the edges of leaves, and golden insects. Faint glitters and movement that could disappear in an instant; it applies to plants, as well as humanity. SUNG Min Woo said, “If you think that the lives of plants and inserts are insignificant… I hope that my life could resemble the lives of plants and insects.” Through such a perspective, I hope that we, too, could look back on our lives through the works of ‘SUNG Min Woo, the Korean painter who paints plants with golden glitters on silk.’



 
 


풀의 그물망으로 엮어낸 관계의 에콜로지


- 성민우의 10년간의 ‘풀’ 연작에 대한 리뷰

황선형(모리스갤러리, 아트허브 대표)

 

풀의 작가로 잘 알려진 성민우는 2014년 ‘일년생’ 이란 책을 펴내면서 “「일년생」은 그 동안 풀과 함께 한 기록들을 모아 놓은 작은 도록이다.” 라고 서문에 밝히면서 “2005년 「풀의 초상」 전시에서 시작한 풀과의 인연이 이제 사람의 관계로 전이(轉移)되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또한 2014년 ‘草像’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성민우는 풀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고개를 숙이고 우연히 걷던 어느 날, 유심히 바라보게 된 흔한 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풀로 이야기를 대신해 왔다.” 고 밝히고, 그 이후 전개된 풀 작업의 경위에 대해 술회(述懷)하였다.

어찌 보면 2014년은 작가 성민우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 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10년 동안 10여 회의 ‘풀’ 연작 전시를 통해 풀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풀어 내고, 그 기록들을 ‘일년생’ 이란 책으로 출판하는 큰 성과를 이루어 냈으니 말이다.

결국 ‘일년생’은 성민우가 가족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뿐만 아니라 작가로 성장하면서 겪어야만 했던 힘겨웠던 삶에 대한 진솔한 자서전(自敍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민우가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며 난산(難産)한 ‘풀’ 연작에 대한 의미를 전시별로 정리해 보면

① 풀의 초상(2005, 대학로 21C 갤러리) - 우연히 마주한 풀에 자신을 이입(移入)시켜 풀에 비춰지거나 연상되는 모습들을 묘사하고

② 흔한 풀(2007, 노암갤러리) -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풀이 갖고 있는 생명에 대한 본능을 금빛으로 예찬하고

③ 풀(2009, 목인갤러리) - 풀에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투영시켜 새로운 양식화를 시도하였으며

④ 가벼운 사랑(2010, 팝아트갤러리) - 죽음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⑤ 풀의 정원(2012, 화봉갤러리) - 온갖 생명들의 삶에 대한 열망들을 노래하고

⑥ 일년생(2012, 갤러리이즈, 모리스갤러리) - 고작 일년도 살지 못하는 풀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연민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나무 위에 풀을 그리고 설치하면서 풀에 대한 의미에 되새기고

⑦ Portrait(2013, ablefineartNYgallery, 뉴욕) /

⑧ 초상(2014, 모리스갤러리) - 위선과 소외로 가득찬 불안정한 관계 맺기를 생태학(生態學)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으며

⑨ 관계의 생태(2014, ablefineartNYgallery, 서울) - 갖가지 풀들의 생명력이 사람의 형상과 핏줄로 전이되면서 자연과 사람을 하나로 인지하는 생태학적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우연히 발견된 풀에 자신을 이입시켜 묘사하기 시작한 풀 작업이 草像(초상)과 관계 맺기를 거쳐 생태학으로 변모(變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그간 10여 회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노트에 전시에 대한 의미와 작업의 본질에 대한 글을 적어 놓았다.

그 작가노트는 상당히 방대한 분량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개인적 심상과 맞물린 작업에 대한 생각들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들을 발췌해 짧은 글로 재구성 해보았다.

 

 


“풀처럼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에너지를 크게 발산시키는 생명체가 또 있을까. … 그들은 내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민 채 앉아 있었다. …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라고 풀과 조우하면서 받은 첫인상에 대해 말하면서 “흔한 풀, 그 생명체들의 생장에 대한 본능과 그 에너지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찰나에 보이는 금빛이다.” 라며 풀이 갖는 본질적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한다.

그리고는 “풀로 사람을 그려 나가면서 푸른 잎맥은 붉은 핏줄로 전이되고 풀의 짧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연민은 사람에게로 대체된다.그림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연민의 방식이다.” 라며 언젠가는 어쩔 수 없는 맞이하는 죽음에 대해 연민하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죽음은 선택일 수 있지만 삶은 의무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습은 들여다볼수록 치열하다. … 죽음 앞에서는 초월하고 숭고해지는 것이 사랑인데 일상의 지리함과 갈등 앞에서는 쉽게 고통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지탱하는 이들은 위대하다.” 라고 다시 삶에 대해 위무(慰撫)한다. “적막함이 깊어지면 하찮은 생명들의 소리가 세상을 채운다. 풀 잎사귀 하나하나의 핏빛소리 모두가 삶에 대한 열망이다.

생존과 번식에 대한 그들의 본능은 솔직하고 아름답다.


어두운 달빛과 바람 속에서 그 생명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풀들의 정원.” 은 아름답다고 고백하고, “고작 일년의 시간도 살아가지 못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 일년은 하루 24시간. 365일의 시간이 아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말라 죽기까지의 시간이다.” 라며 일년생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늘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바란다. 사회라는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 구성원이 됨으로써 내적 평온함을 찾으려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외로울 필요가 있다.

스스로 습관적인 관계 맺음으로부터 소외 되어야 한다.


관계 맺음으로부터 자발적 격리가 이루어진 경우라면 외로움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 외로움이 나를 해독시키면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등이 아닌 얼굴을 들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하고 통할 것이다.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며 관계 맺음에 언급하고 “풀도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들의 운명은 어딘가에 뿌려진 씨앗으로부터 시작된다. 풀들의 생명은 그들의 선택이나 의도가 아닌 환경을 부여 받고 싹을 틔우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생태는 주어진 삶에 성실히 적응하면서 완성된다.” 고 관계 생태학적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성민우의 풀 작업은 의미론적 변화 못지 않게 표현상의 기법에 있어서도 몇 번의 변화를 겪어 왔다.

처음 풀 작업을 시작한 ‘풀의 초상’과 ‘흔한 풀’ 전시에서는 사실적으로 세부를 묘사하여 확대하거나 강렬한 색채로 형태를 표현하였으며, ‘풀’ 전시를 통해서는 검은 배경을 끌어들여 바짝 말라 버린 풀을 대비 시키거나 생로병사의 굴레 안에서 치러야 하는 결혼과 가족의 구성원으로써의 통과의례를 극명하게 표현하였으며, ‘가벼운 사랑’과 ‘풀의 정원’ 전시를 통해서는 사랑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닮은 바위와 같은 무생물로 풀의 정원을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일년생’ 을 통해서는 나무 판에 풀을 커다랗게 그리고 오려낸 뒤 색을 입혀 설치 작업을 시도하고, ‘草像’ 전시 이후부터는 갖가지 풀들이 사람의 형상과 핏줄로 표현되고, 사람의 형상을 풀로 감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번 프랑스의 갤러리 bdmc(galerie Beaute du Matin Calme)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바로 이전의 ‘관계의 생태’ 전시에서 보여준 에콜로지(Ecology)에 대한 연속적 작업이면서 에콜로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교두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풀을 매개로 식물과 사람, 사회적 구조까지 아우르는 성민우의 에콜로지 작업이 의미론적으로는 이미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해외라는 물리적, 장소적 제약으로 제한된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할 수 밖에 없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자연과 사람을 하나로 인지하는’ 에콜로지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성민우는 그간 10년간의 긴 시간 동안 풀 작업에 천착(穿鑿)하면서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의 미학’ 이라는 평가를 받는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다.

그 성취는 지난(至難)한 작업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쌓은 내공과 강인한 성격, 그리고 긍정적 사고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필자는 그 동안 그녀를 볼 때 마다 외유내강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심지(心志)있는 작가라는 인상을 자주 받곤 했다.

꿋꿋함과 지구력 그리고 순발력까지 갖추었으니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 동안 달려온 10년간의 ‘풀’ 연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다.

이번 프랑스 전시 이후 더 심화될 ‘에콜로지’의 작업은 물론이고 또 그 이후의 작업들도 어떻게 전개될지 자못 궁금하다.

앞으로 만개할 성민우의 작품세계와 좋은 작가로 성장할 성민우의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일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Ecology of Relationships Created with a Matrix of Grass

- A Review on Serial Work The Grass of 10 Years by Sung, Min Woo

 

  Sunhyung Hwang(CEO of Morris Gallery & ARTHUB)

 

Sung, Min Woo, known as an artist of grass, mentioned on preface of her book Annual Plant, “Annual Plant is a small document about what I have experienced with my motif, grass.” Also, she stated that her primary concern has gone through a transition from grass to human being since 2005 Portrait. In her statement of The 2014 The Image of Grass exhibition, she explained how she initiated to take her motif from it, “ One day I was walking with my head bended along the road, I came across and stared at ordinary grass and then tried drawing a single grass, which was the beginning of telling my artistic narrative through it. To her, the year 2014 is probably meaningful and it has good reason to be remembered in that she has represented a wide variety of thoughts and emotions through 10 exhibitions for 10 years with the serial work The Grass. What is more, her book Annual Plant that was published that year was outstanding achievement. The book can probably be a sort of autobiography since she described her life of hardship not only as a family member, a member of society but also as an artist undergone trials while growing up to be an artist. 

 

Here are a list of her exhibitions to have filled the stage with grass painting constantly created struggling against herself. On Herbage Portrait (2005, 21c Gallery, Seoul), she depicted multiple images reflected on it and those we can associate with it. Paintings on Herbage Met with Everywhere (2007, Noam Gallery) highly admired the instinct for its life force that can be seen everywhere. Herbage (2007, Mokin Gallery) had a characteristic of attempting new artistic style by reflecting her individual experience pertaining to grass. The exhibition The Love of Life Lightly (2010, Pop Art Gallery) offered encouragement to viewers living in tough circumstances. The works of The Grass Garden (2012, Hwabong Gallery) mainly featured the longing for existence of all living things. On Annual plant(2012, Morris Gallery, Gallery Is), woods was carved into the shape of grass and installed in  space, with feelings of pity for its destine to live and can’t avoid death for just only one year. Portrait ( 2013, ablefineartNYgallery, New York) was mounted in New York. On Portrait (2014, Morris Gallery), she represented the precarious relationships full of hypocrisy and isolation with perspective of ecological dimension. Ecology of Relations (2014, ablefineartNYgallery, Seoul) developed her painting based on such viewpoint that nature and human being become one, which she considered as her main idea, depicting the life force of a variety of grass which turned into human being’s image and one’s blood vessels. Consequently, her painting based on this perception has driven her to evolve her idea and to build relationships between them, altering her art that is filled with the point of view, and her painting was dominated by it. While preparing 10 exhibitions, she has written down her idea on its definition and its nature.  Here are some of her statements that is extracted from her statement.

 

“Are there living things that give off their energy in a short time like grass?... They were sitting facing me... They were living their lives calmly”, said the artist. It probably was the first feeling or impression when observing the grass. She highly admired its essential beauty, saying “Their life force stemming from their instinct of growth and their energy made me feel beautiful. I captured the true beauty at that very moment.” “Their green veins changed into one’s red blood vessels and the compassion caused by their short life and death produced empathy towards human being. In this respect, painting is the best way to express sympathy to me.” “Living is great. That’s because death can be a matter of choice, but life is duty.”... “When observing living things, I found them struggling with themselves fiercely. Love feels like something sublime and remains aloof before death, but it changed into pain in front of boredom of daily lives and conflicts. That’s why human beings who manage to sustain their lives deserve to be highly esteemed“. The artist gave comfort to one’s life struggling against a painful condition. “Deep silence makes the world filled with sounds out of trivial living things. Sound from each grass conveys its desire for life. Its instinct towards existence and reproduction feels explicit and beautiful. Its sounds can be heard from dark moonlight and the wind. Those who are living less than one year teach me how I should live. One year never means just simple number of 24 hours / 365 days. Its focus lies in time from budding, bearing fruit to withering”. She mentioned a philosophy of life that she learned from the annual plants. “One always desires to build relationships with others and pursues inner tranquillity by becoming a member of society. However, one sometimes does need to be lonely and also needs to completely isolate oneself from the relations so that voluntary loneliness can create new meaning and feelings beyond what we have thought so far. Loneliness helps face each other with our heart open, allowing us to communicate with others.” ... “Grass is also living in relationships, starting its destiny from seed somewhere, beginning life in a circumstance which is neither choice nor intention and it finally completes life when grass is able to adopt a given condition.” said the artist.

 


 

 

In terms of technique, she has changed it a few times along with aspects of its concept. On Herbage Portrait and Herbage Met with Everywhere, her paintings were realistically portrayed and enlarged with intense color. Through Grass, obvious contrast was expressed with fully dried ones by employing gloomy background, and she obviously represented rite of passage of human being living under the four phases of life the birth, or old age, sickness, and death such as a marriage life and life as a member of family. Through The Love of Life Lightly and The Grass Garden, non-living things such as rocks which look like loving couple were employed to create the garden. On Annual Plant, grass objects cut out of wood panel were installed with colors applied on them. Since Portrait, a rich variety of grass has formed one’s bodies wrapped by it.

 

On this exhibition at bdmc (galerie Beaute du Matin Calme), she is going to display paintings based on Ecology concept shown from Ecology of Relationships and they are expected to serve as a momentum to place priority to Ecology painting. With grass, she dealt with human, plant and society, which signifies that her paintings are put emphasis on aspects of meaning. Despite its physical and spatial limit from overseas exhibition, I’m quite sure that philosophical perspective of identifying nature with human can be well delivered. Over a period of 10 years she has been obsessed with grass painting and has gained the judgement of ‘aesthetic of empathy’. This achievement probably came from some elements; her spiritual power, strong personality, and affirmative thinking. She sometimes gave me an impression of being gentle in appearance, but sturdy in spirit. It is natural that I have been favorably impressed by her due to her determined mind, endurance and agility, too. Dedicating herself to grass painting for 10 years, her serial work The Grass is about to take a next step towards her new world. I wonder how far and deeply her ecology painting will evolve after this exhibition in France. She is expected to eventually blossom out into an influential artist and I look forward to meeting her future world proceeding towards full bloom.



 
 




성민우의 풀의 노래 : 생명의 그물망과 생태사회학


김준기(미술평론가)

 

성민우는 풀을 빗대어 사람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풀로 그린 사람의 모습, 즉 초상(草像)이며, 풀의 생명가치로부터 인간의 삶의 이치를 찾아내는 다중적 의미지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이름의 풀들을 화려한 금분과 채색으로 그려낸다.

여뀌, 씀바귀, 환삼덩굴, 큰방가지똥, 겨울달맞이, 겨울여뀌, 이른냉이, 냉이, 민들레와 지칭갱이, 질경이, 망초, 여름여뀌, 고들빼기와 며느리밑씻개, 가시상치와 며느리밑씻개, 달맞이와 환삼덩굴, 며느리배꼽 등 그가 호명하는 풀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깨알 같은 서사를 가지고 있다.

화단에 심어 기르는 화초와 달리 그가 불러 세운 풀들은 잡초로 분류하는 것들이지만, 그는 풀로 엮은 인물화 연작을 ‘초상’이라 이름 짓고 그 뒤에 이런저런 잡초들의 이름을 붙여서 각각의 그림에 뜻을 더한다.


 

성민우 풀그림의 단초는 생명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해답에 있다.

그가 덜 알려진 풀들을 호출한 이유는 그 자신이 명명한 ‘외로움과 관계맺음의 초상’에 다가서기 위함이다.

그가 불러낸 풀들은 생명의 존재론을 표상한다.

성민우의 예술 속에는 우주와 생명의 노래가 담겨있다는 점을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인간 존재는 누군가와 관계맺고 소통하기를 원하지만 필연적으로 그 소통의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고 고독에 빠진다.

성민우는 이 대목에서 존재론적 고독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스스로 외로움과 관계맺기’를 권면한다.

그가 그린 풀의 초상은 존재론적 고독을 읊조리는 애달픈 노래가 아니라 그것의 초극을 위한 역설의 감성학이다.

그의 노래가 마른 풀의 애잔한 고독을 품고 있을 때에조차 그 속에 절대로 고독에 빠질 수 없는 우주와 생명의 깊은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봄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맞아 생명현상을 멈춘 마른 풀을 그렸다.

2009년 무렵의 연작들 가운데 하나인 ‘그녀를 위한 부케’는 순결함이나 화려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화훼농장 출신의 부케와는 달리 마른 잡초로 꾸민 낯선 모습이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나름의 생명의 이치를 가지고 한 생을 살아낸 고귀한 존재를 호명하는 성민우의 시선은 생명에 대한 낮은 목소리의 사랑 노래다. 어디에 핀들 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그는 생명의 서사를 엮어내는 알레고리로 부처와 나한과 보살의 도상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결혼사진이며, 가족사진을 풀그림에 대입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 형상 안팎에 얼기설기 엮인 마른 풀의 노래가 인연(因緣)과 인과(因果)를 함께 녹여 우주와 생명을 사유하는 성찰의 세계관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른 풀의 생명예찬을 넘어 인간 삶을 다루고 있는 근작의 씨앗이 담겨있는 작품들이다.

 

 

구작 풀그림에서는 식물의 줄기를 기본적인 구조체로만 묘사한 것에 비해, 신작 풀그림에서는 그 줄기를 좀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신작들에서 나타나는 줄기 선은 시각적인 역동성을 확보하면서 생명의 네트워크를 가시화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줄기의 존재를 부각함으로써 성민우가 획득한 것은 낱개의 잎새가 아닌 순환의 고리로서의 풀을 통하여 네트워크로서의 생명현상을 표항하는 성찰적 사유이다.

그의 근작 풀그림 전반에 걸쳐 도드라져 보이는 줄기 선의 변주는 그의 그림에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줄기 선의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펼침으로 인해 그의 풀그림인물화는 환영에서 상징으로 진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풀그림은 풀의 형상을 얽어서 인물을 형상화하는 ‘환영의 회화’이면서 동시에 풀의 생명네트워크를 인체 내부의 생명의 고리와 더불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네트워크로 확산하려는 ‘싱징의 예술’로 해석의 지평을 확산한다.

 

 


성민우의 풀그림이 한층 더 넓은 비평적 의미를 갖는 대목은 그것이 풀의 형상을 통하여 생명의 그물망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풀잎이나 꽃의 존재만이 아니라 줄기를 타고 흐르는 생명의 그물망을 펼쳐 보인다. 근작들에서 보이는 남녀 초상은 격렬하게 키스하는 연인이나 홀로선 남녀의 모습이다.

그것은 구작에서 나타나는 인물상들과 외형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인물들을 구성하는 풀의 줄기가 마치 인체의 혈관이나 신경망을 보는 듯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신작에서 나타나는 줄기 선의 그물망 구조는 생명현상을 일종의 네트워크로 설명하는 과학적 시각과도 만난다. 온몸 구석구석까지 연결된 뉴런의 세계는 생명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표상한다.

성민우의 근작에서 온몸을 타고 흐르는 그물망의 선들은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화면에 율동감을 부여하는 조형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식물과 인간 개체, 나아가 사회의 구조를 관통하는 네트워크의 세계를 보여준다.


나아가 성민우의 풀그림은 생태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그림은 풀의 생태학에서 나타나는 생명현상의 보편적인 순리를 인간의 신체와 인간의 사회학으로까지 확장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풀의 노래를 인간사회의 그물망으로 연결하려는 그의 모색은 언필칭 식물성의 사유다.

그가 줄기 선을 역동적인 변주의 세계로 변용한 것은 그의 그림을 형상 중심의 환영으로부터 역동적인 은유와 상징의 세계로 진일보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그것은 풀그림의 생태학을 관계의 사회학으로의 확장하게 해주는 결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말하는 ‘외로움과 관계맺기’라는 언설을 이중적인 역설의 상황에 놓이게 한다는 점에서도 줄기 선의 비중은 매우 크다.

자칫 인물의 내면을 채우는 풀잎의 동어반복에 빠질 수도 있는 풀그림에 꿈틀거리는 선들로 자극의 요소를 가미하고 나아가 그것을 자연생태와 인간사회의 네트워크로 확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민우의 풀그림에는 작은 것의 위대함과 일상의 거룩함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적 사유가 담겨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생명의 가치를 돌아본다.

그것은 생명의 네트워크를 생태사회학으로 확산하려는 우주와 생명의 노래이다. 무릇 생명은 낱개의 것으로 태어나 스스로 사라지는 개별의 존재이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개별자 모두는 태어나고 성장하여 소멸하는 것이 저 혼자의 일인 듯 부질없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생명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생명의 순환고리 바깥에 존재할 수는 없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대자연 속에서 단 한 해를 살다 가는 풀 한포기조차도 그 자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 그 속에는 우주와의 관개맺음이 담겨있다.

풀은 가까운 곳 땅과 관계맺음으로 인해 뿌리를 내리고 존재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으며, 저 멀리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별로부터 에너지를 내려 받음으로써 생명현상을 지속할 수 있다.

풀 한 포기가 자라나고 꽃 한 송이가 피어날 때도 온 우주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지 한 톨, 꽃 한 송이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고 하지 않는가!




 
 




만만한 풀

 

풀은 만만했다. 가까이 있었고, 언제든 충분하게 많아서 뜯고 꺾고 뽑아도 양심에 많이 걸리지 않았다.

뿌리도 야트막하게 박혀있어 힘들이지 않고 뽑을 수 있었다. 모양도 색깔도 향내도 다양해서 지루하지 않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어도 조금만 살펴보면 찾을 수 있었다. 풀이라서.


그래서 이름이 풀인가 했다.


어릴 적 읽었던 시에서 기억나는 한 구절이 있다.


‘풀, 풀은 참 좋은 이름을 가졌다 ’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또 있을까.


그래서 고맙다. 세상 살아가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조금씩 알아갈 때 쯤 풀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지금보다도 더 어릴 때, 강한 자 앞에서 약하지 말자.

약한 자 앞에서 강하게 굴지말자고 수없이 다짐하고 살고 싶었지만 나는 세상 앞에서 한없이 겁에 질려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만만한 풀만 바라보며 세상을 회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약한 풀 앞에서 강한 척 하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니까 그냥 ‘나나 너나…….’ 하며 피식,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이란 건 참 신기하더라. 살아있는 걸 만지면 보드랍고, 쥐어뜯으면 아파하더란 말이다.

그래서 고맙고 미안하고 참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곤 했다.


나도 집에서 몇 개의 화분에 화원에서 사 온 나무와 화초를 기른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냥 풀하고는 대하게 되는 자세부터가 달라진다.

왠지 부담스럽고, 손이 가고,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가 간혹 화분 주인 옆에 떨어진 풀씨가 싹이 터 자라면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민한다. 뽑을까 말까……. 그런 게 풀이더라. 

어느 날부터 나와 함께 삶의 시간을 살아가주는 풀들에게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아직도 표현에 서툴고 솔직하지 못한 나를 이해해주는 그 것들은 참으로 대단한 녀석들이다. 만만해 줘서 고맙다.

내게 닥쳐 온 시간들 앞에서 만만한 것이 한 두 가지쯤은 있어줘야 자신 있는 척 얼굴을 내밀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상의 대지를 뒤덮고 있던 식물, 풀.


그들이 내 옆에 있어줘서 참 다행이다.


『일년생』은 그동안 풀과 함께 한 기록들을 모아 놓은 작은 도록이다. 2005년「풀의 초상」전시에서 시작한 풀과의 기록이 이제 사람과 관계로 전이되어졌다.

내게는 용기 있는 변화지만 풀에게는 미안한 점도 있다.

그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무시한 채 내 맘대로 여기저기 그들을 옮겨 놓는 것이 아닌가해서다.


아직 덜 살아서 더 겪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다행이기도 하다.

그림으로 나의 시간들과 체험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슬슬 거닐다가 만나게 되는 만만한 그들과의 인연으로 나는 힘을 내어 살아갈 것이다.


2014년 여름 성민우



 
 




관계의 생태

 

냉이와 씀바귀의 꽃대가 올라가고 열매가 맺힐 때 쯤, 그늘진 곳의 애기똥풀도 떨어진 꽃잎자리에 기다란 씨방을 만들어 간다.

늦은 봄 혹은 이른 여름은 작은 풀들의 열매가 익어가는 시간이다.

가을풀의 꽃대와 열매가 크고 단단하다면 초여름의 풀들은 그보다는 작고 여리다.


풀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을 닮는다.

그 시간 속에는 기온과 습도, 바람, 강우량, 땅의 무른 정도, 주변 생물들의 종류 등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봄에  피는 풀과 여름에 피는 풀이 서로 색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그들이 원래 그 색, 크기, 모양을 가졌던 게 아니라 그 시간과 장소에 싹을 틔우고 자라면서 그 모양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삼밭에 난 쑥이라는 뜻의 마중지봉(麻中之蓬)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곧게 자라는 삼 옆에서 쑥이 자라면 쑥도 곧게 자란다는 뜻으로 선한 사람과 사귀면 그 영향을 받아 자연히 선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처럼 식물은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의 모양을 바꾸는데 능숙하다.

사람이 자신의 타고난 유전적 요인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시간과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맺음이 항상 사랑, 기쁨, 행복, 보람으로만 돌아오진 않는다.

미움, 두려움, 절망, 분노, 죄책감과 같은 피하고 싶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배워간다.

 

그동안 풀로 사람을 그리면서 나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외로움의 필요성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나라는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맺어진 관계는 쉽게 불편해지고 고통스러워지고 피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 없는 삶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난 뒤 다시 나의 관계맺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떤 관계를 필요로 하는지, 어떤 관계에 힘들어하는지 말이다.

 


풀도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들의 운명은 어딘가에 뿌려진 씨앗으로부터 시작된다.

풀들의 생명은 그들의 선택이나 의도가 아닌 환경을 부여받고 싹을 틔우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생태는 주어진 삶에 성실히 적응하면서 완성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항상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의 씨앗은 주로 메마르고 거친 길가나 공터에 뿌려지고 생태계 가장 아래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운명을 짊어지고 시작된다.

그런 그들도 주변 누군가와 경쟁하며 공생하며 살아간다. 가장 무서운 인간에 의해 뽑히지만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들이 좀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일 년도 안 되는 삶이 그들에게 할당되었기 때문일 거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들은 생장하고 번식하는 전 생애를 다 겪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불만이나 변명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바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끔은 벌레가 찾아오고 덩굴이 감긴다.

메꽃이나 환삼덩굴, 며느리배꼽 같은 덩굴풀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기도 하고 다른 풀에 의존해 생장하기도 한다.

단단한 줄기가 아닌 가느다랗고 여린 줄기로 기어 다녀야 하다 보니 스스로 가시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어떤 존재든 각자의 삶이 존재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보이고 우주가 돌아간다.

길가에 피어난 흔한 덩굴 풀 한 줄기마저도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더하지 않을까. 내 삶의 중심이 나이기 때문에 나는 주변의 타인과 다른 색깔, 다른 성격, 다른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가끔 나도 타인들에게 의존하고 감기며 살아간다. 그러한 생태는 가장 가까운 존재들과의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내가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면서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겹쳐지다보면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것 같다.

관계가 한결같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어질까. 관계는 맺어졌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기도 하면서 작은 풀밭의 생태계처럼 지속되어진다.


사람은 어떤 생명체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강하고 예민하게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관계와 관계맺음의 성격에도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끝없이 원하고 자주 지루해 한다.

삶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는 살아있다.

사람이든 풀이든 생명은 각자의 삶을 소리 없이 묵묵히 지켜내며 가끔 그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자신에게 약이 되어 단단해지고 성장한다.


환경에 대한 풀의 적응이 단순한 생장으로서 만이 아니라

성장일 수 도 있는 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상황이 메마르고 거친 황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른 생명체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이 그리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그들은 항상 꿋꿋하게 열매를 맺고 씨를 퍼트리며 살아간다.

사람들의 삶도 관계를 통해 지속되고 관계로 인해 힘들어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할당 된 삶의 시간들 속에서 그 관계맺음이 나의 열매를 단단히 맺게 하는 근간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의 삶 속에서 관계들은 공고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며 이어지고 있다.

가끔 의도적인 관계맺음으로의 이탈이 필요하긴 하지만 또 다시 덩굴풀의 줄기는 슬그머니 나를 감싸 안을 것이다.


2014년 성민우 작가노트



 
 



외로움과 관계맺음의 초상

 

혼자 있어 쓸쓸하다는 의미를 가진 외로움이라는 말에서는 깊은 슬픔의 무게 보다는 가벼운 공기가 느껴진다.


인간은 늘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바란다. 사회라는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 구성원이 됨으로서 내적 평온함을 찾으려 한다.

꾸준히 친구와 이성을 필요로 하고, 가족을 구성하고,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며 그 소속감을 바탕으로 외로움을 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이탈되었다고 느낄 때 우울함을 느낀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매체들은 우리에게 누군가와의 소통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매체의 발달과 빈번한 소통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은 더 자주 더 깊게 나타난다.

걸려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외로움의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증상은 관계맺음의 중독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외로울 필요가 있다. 스스로 습관적인 관계맺음으로부터 소외되어야 한다.

관계맺음으로부터의 자발적 격리가 이루어진 경우라면 외로움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내 안에 깊이 들여놓는다면 그 외로움은 타인과의 결별이 아닌 나 자신과의 깊은 조우가 될 수 있다.

외로운 나를 들여다보고, 비워내고, 그 안에 들어가 나를 만나야 한다.


외로움이 나를 해독시키면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등이 아닌 얼굴을 들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하고 통할 것이다.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4월 작가노트



 
 




일년생_나무위에 풀을 그리며

 

고작 일년의 시간도 살아가지 못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 어느 때인가 싹을 틔우고 자라나 이제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나도 언젠가는 말라 없어져 버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일년은 하루 24시간, 365일의 시간이 아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말라죽기까지의 시간이다.

그들에게 일년은 짧다거나 길다거나 하지 않은 한 평생을 의미한다.

나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을 그린다. 실재의 그들은 이미 뽑히거나 베이거나 썩거나 말라 없어져 버렸을지 모른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들을 연민하고

그들을 그리워하다가

그리고 그들이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풀의 생명, 작은 우주 풀의 생명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들 사이를 가볍게 뛰어다닌 작은 벌레들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 뿐 인 것 같다.

풀, 풀은 오늘도 일년의 생명을 살아간다.

 

2012년 9월 ‘일년생’ 전시 작가노트



 
 


하찮은 생명들의 정원

 

땅과 물, 하늘에 온갖 생명들이 가득하다.

바람 한줄기, 풀잎사귀 하나, 작은 벌레 한 마리까지 귀하지 않은 목숨이 있을까.

모두가 살아갈 이유가 있는 인연들이다.


봄이 되니 양지에는 민들레와 냉이가 지천이고 그늘진 곳에는 애기똥풀과 뱀고사리가 재빨리도 피어났다.

보랏빛 찬란한 밤, 풀벌레조차 잠든 깊은 고요 속에 그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물과 바람의 소리와도 닮았다.

적막함이 깊어지면 하찮은 생명들의 소리가 세상을 채운다.

풀잎사귀 하나하나의 핏빛소리 모두가 삶에 대한 열망이다.

생존과 번식에 대한 그들의 본능은 솔직하고 아름답다.

어두운 달빛과 바람 속에서 그 생명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풀들의 정원.

 

2012년 4월 작가노트




 
 





가벼운 사랑 

 

삶을 선택한 이들을 위한 찬사

화면에는 여름과 가을을 거쳐 가는 풀들이 등장한다.

뜨거웠던 여름, 어느새 지나가버린 가을, 스산한 겨울 문턱에까지 나는 풀들과 만나고 있다.

질경이와 달개비, 강아지풀과 바랭이가 여름풀로 등장하고 어느 순간 마른 가지의 그령과 여뀌가 화면을 메워간다.

일찍 찾아온 추위에 땅바닥 넓게 순을 뻗어버린 겨울달맞이꽃과 소리쟁이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치, 메뚜기, 섬서구메뚜기, 베짱이, 풀무치, 땅강아지, 귀뚜라미 등등 이제는 풀만큼이나 다양한 벌레들이 날아다니고 뛰어다닌다.

풀들을 치장한 것처럼 벌레들 또한 금빛으로 치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아주 가볍게 풀잎과 가지와 씨앗사이로 움직인다.


검은 배경에 풀로 뒤덮인 부케와 인물군상들을 그려내던 강렬한 인상 대신 붉은 빛이 도는 황금빛 바탕에 화려한 채색의 풀들 사이로 작은 풀벌레들이 모여들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가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장식적인 민화풍의 색감이 등장하기도 하고 부케형식의 풀다발이 공간을 차지하기도 한다.

지난 작업들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풀이 그리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승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이번 작업들은 그에 비해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가벼운 찬사라고 할 수 있다.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이 삶일 수 있음을 조금 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죽음은 선택일 수 있지만 삶은 의무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습은 들여다볼수록 치열하다.

너무 가까이, 너무 깊게 바라보면 그 사랑은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일상의 삶은 아름답기도 하다.

아주 가볍게 스쳐 지나가듯 보면, 그 모습은 쉽게 사랑할 수 있다.

삶의 근처에서 바라보기, 삶을 가볍게 사랑하기, 그것은 삶을 선택한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방법이다.

무한한 감정의 원천이 되는 우리의 사랑은 현실 안에서 그리 뜨겁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애끓는 사랑이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 유토피아적 사랑이든, 사랑이 일상을 마주하면 쉽게 힘겨워 진다.

죽음 앞에서는 초월하고 숭고해지는 것이 사랑인데 일상의 지리함과 갈등 앞에서는 쉽게 고통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지탱하는 이들은 위대하다.


 

풀과 벌레의 삶

나에 대한 나의 위로

그냥 스쳐 지나는 장면처럼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만족하면 좋겠다.

가볍게 풀잎 사이를 뛰어다니는 풀벌레들의 삶을 바라보듯 말이다.

우리가 풀과 풀벌레의 삶이 고단하지는 않을 지 고민하고 대신 힘들어 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들의 삶이 가볍고 경쾌해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다른 이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괜찮은 경험이다.

고통 없는 현실이 비록 비현실적이더라고 그렇게 보이는 것도 바로 현실이다. 그들의 삶의 한 모습은 다분히 현실적인 것이다.


풀과 벌레, 그들의 삶을 아무리 재현해 내려 애써도 그것은 사실적일 수 없다.

나의 재현은 그래서 비현실적인 재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그림은 사실적이지 않다.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 순간의 기억들과 함께 나의 눈과 손으로 담아낸 것 뿐 이다.

그렇게라도 삶이 가벼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모두에 대한 연민이다.

살아있는 이들이 삶을 가볍게 사랑했으면, 나의 삶도 저토록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그것이 현실이 아니더라고 그렇게 보인다면 좋겠다. 너무 깊이 알지 않기, 너무 깊숙이 파고들지 않기.

그래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초월과 숭고를 포기하고 시간을 버텨내는 이들의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차피 살아가야 한다면 그들의 삶이 가끔은 아름답게 포장되어도 좋지 않은가.

나의 작업에서 꽃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나비를 찾아볼 수도 없다.

꽃처럼 나비처럼 보이는 삶도 사실은 풀과 벌레다. 꽃과 나비가 아니어도 충분하다.

꽃도 나비도 풀과 벌레도 모두 가까이 보면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누가 더 아름답다고 여겨지는가 보다 누가 더 가볍게 가볍게 이 풀에서 저 풀로 경쾌하게 옮겨 다니는가가 중요하지 않은가.

풀과 벌레의 삶의 형상이 가볍다고 여겨진다면 스스로의 삶도 그렇게 바라보기를, 나의 삶이 풀과 벌레 같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작업들이 어떤 결과이기보다는 한 과정임을 고백한다. 풀에 대한 나의 집착이며, 애정의 한 방식임은 틀림없다.

난 이번 작업들을 통해 내 삶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나를 위로하며 풀을 그리고 있다.


2010년 11월 작가노트








결혼, 일년생 풀들의 노래1)


김홍기 (미술평론, 패션큐레이터)

 

대지의 풀들, 정녕 강한 것들의 세계

꾹 짜면 쪽빛이 우러날 것 같은 결 고운 하늘, 짙어가는 겨울의 한복판을 건너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전시 제목은「일년생」. 무슨 뜻일까 하고 들어갔는데 작가 이름이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습니다.

혹시나 해서 화가의 전체 작품을 묶어놓은 도록을 보고서야 ‘아, 이분이구나’ 했답니다.


몇 년 전 한국인권재단과 함께 ‘마흔 살, 남자학교’란 프로그램으로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미술치료 분과를 맡아서 남성분들과 그림 수다를 떨었습니다.

가족과 사랑, 꿈, 아내에 대한 생각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당시 40대 남자에게 결혼이란 무엇일까를 그림으로 풀어보려고 데이터베이스를 뒤졌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한편의 그림이 있었으니, 성민우란 작가가 그린 결혼사진 그림이었습니다.

검은 배경을 구성하는 비단위에 금분과 채색을 이용해 정교하게 그린 가족사진과 결혼식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사람들의 모습이 풀로 엮여 있습니다. 금빛과 보라색, 녹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촘촘하게 짠 한 장의 직물처럼 인간의 몸을 감쌉니다.

그림의 의미가 궁금해 작가에게 의미를 물었습니다.


질경이는 양지에서 잘 자라는 풀이고 달개비는 음지에서 잘 자랍니다. 흔히 여성은 음으로 남성은 양으로 이야기됩니다.

이 작업에서 여성은 질경이로 남성은 달개비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일종의 도치입니다.

붉은 선으로 그려진 풀 하나하나의 잎맥은 각기 다른 풀로 그려진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를 엮어 냅니다.

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다른 성, 다른 배경, 다른 성격이 만나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것을 결혼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결과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혼을 통해 서로 함께 살기 어려운 질경이와 달개비가 혈연, 핏줄보다 어려운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수많은 갈등과 오해가 결혼 뒤에 이어지지만 가족, 혈연이라는 관계로 결혼은 공고해져 갑니다.

양지에서 자라는 질경이는 음지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달개비는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잎을 피우지만 양지보다는 음지의 서늘함을 더 닮았습니다.

너무나 다른 이 풀들의 교집합을 결혼이라는 형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작업입니다.

 

성민우 작가는 12년의 결혼생활 동안 소중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그림을 시작했고 학부시절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작가 본인의 표현대로 ‘결혼이 아닌 시집을 갔다’라는 점을 되짚어보면 그림 속 풀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빨리 시작한 결혼생활은 녹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대 상황 때문에 아버님을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동안,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던 작가는 어느 날 산책길에 피어난 질경이 꽃을 봤습니다.

남초록과 보랏빛 들풀이 군생을 이루며 자라는 길을 따라 걷는 시간, 작가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단순한 맺어짐이 아닌 어떤 삶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상황의 연속’이라고 믿게 되었다지요.

 


5회 개인전_풀 전시장면 2009

그녀가 그린 또 다른 그림 <가족>은 결혼식장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안은 인물과 어린 조카들, 어머니와 시집안 간 누이들까지. 식물의 이미지로 그려진 가족은 다름 아닌, 결혼 이후에 우리가 갖게 될 미래의 땅입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들을 품었을 것입니다.

선을 그린다는 뜻의 드로잉에는 끄집어낸다는 뜻도 있지요. 작가가 끄집어낸 내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죠.

 

식물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이다

질경이는 길가에 피는 들풀의 대명사입니다. 이 풀의 특징은 반드시 길이란 상수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길을 따라 자라는 속성 때문에 독일에서는 ‘길의 파수꾼’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지요.

식물의 섭생을, 그들이 성장하고 사멸하는 과정의 속살을 조금만 살펴보면, 인간의 삶이 남우세스럽기만 합니다.

질경이가 길을 따라 자라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의 발에 밟히는 것을 오히려 역이용하기 위해서랍니다.

씨앗은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동물의 발바닥에 묻어 새롭게 자라날 자리를 찾아 종자를 퍼뜨리지요.

그렇게 지르밟아도 쉽게 꺾이지 않는 것은 질경이 잎 속에서 강한 실처럼 차오르는 다섯 가닥의 줄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연해서 언제나 자신의 몸을 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짙은 초록빛 이파리 속에서 다섯 가닥의 줄기는 마치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혈관처럼 이음새 없이 서로를 견인합니다.

 


보랏빛 달개비는 또 어떤가요? 이 꽃은 세 개의 단아한 타원형의 꽃받침을 피워내며 길가나 풀밭, 냇가 같은 습지에서 자랍니다.

각 마디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많은 줄기가 자라나는 달개비. 이 풀은 한창 피어날 때면 이파리가 실크처럼 부드러워서 명주나물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양지에서 자라는 질경이와 음지에서 잘 자라는 달개비는 태생상 결코 만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이렇게 확고부동한 삶의 방식을 익히며 살아온 두 개체가 하나로 묶이는 사회적 사건이 바로 결혼입니다.

교육을 통해 새겨진 취향과 태도가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취향과 하나로 통합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 캔버스의 배경이 검은색일까요? 검은색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힘을 갖습니다.

그러니 결혼이란 엄연한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은유하는 것은 아닐까요.

섬세하게 뿌리를 내리는 질경이와 보랏빛 달개비는 결혼을 통해 얻고자하는 행복에의 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흔히 음과 양의 세계라 부르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도치시킨 것은, 지금껏 우리가 지나친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구분된 세계를 살아오느라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요?

여성이 남성을 배우고, 남성이 여성을 배울 때, 각자가 대지 아래로 내리고 있던 뿌리는 하나로 모여 금빛 찬란한 화엄의 세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화엄이 별것인가요? 엄숙하고 단정하게 제자리에서 피는 꽃들의 속살에 각인된 수많은 계절의 수행이 아닐까요?

지르밟을수록 자신의 지경을 확장하는 질경이와 단단한 매무새를 갖추었으되 표면은 명주처럼 보드라운 달개비에게서 사랑의 묘약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달개비는 몸의 열을 내리는데 좋다지요. 생의 고비, 결혼의 환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차오르는 이유 없는 열을 내리고 싶다면, 오늘 하루 남편을 꼭 안아주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1) 이 글은 패션큐레이터 김홍기의 『댄디, 오늘을 살다』(2014, 아트북스)에 수록된 글로 저자의 동의를 얻어 수록하였습니다.



 
 




연민과 숭고 그리고 장엄


류 철 하 (미술평론가)

 

풀의 영고성쇠와 장엄

성민우는 한여름 길가에 피고 지는 소소한 식물들, 방동사니, 그령, 쑥부쟁이, 망초, 돼지풀, 방가지똥 등 생소한 그러나 정겨운 풀들에게 강한 존재감과 생명력을 부여한다.

우기와 건기를 거치는 몇 달의 여름이 지나고 자잘한 꽃과 씨앗을 매달며 생장과 번식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풀들은 계절이 지난 어느 즈음에 꼿꼿한 그리고 찬란한 죽음을 맞는다.

생명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풀의 영고성쇠와 장엄은 숭고와 연민, 생명의 순환과 원형을 느끼게 한다. 


이 소소한 장엄을 부각시키기 위해 검은 화면의 강력한 배경위에 식물의 형태를 금분과 채색으로 올린 작업의 이면에는 죽음을 이긴 강렬한 생의 환희가, 죽어서도 금빛으로 빛나는 절정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금빛과 보라, 녹색의 조화를 통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다하는 풀의 장엄을 전개시킨다. 붉고 푸른 보랏빛 힘들, 힘줄 같이 연결된 피의 혈맥들은 식물과 꽃의 이미지이면서 인간 삶의 연관을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성민우는 이전 작업에서 생명의 이상과 원형이 만나는 순간의 광휘를 금빛으로 그려내면서 형태의 순수성과 생장의 추상적 성격을 담아냈다면 금번 작업에서는 이러한 순수성의 형태위에 개인적 시각의 사물과 기억, 경험을 담아 양식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생장과 번식의 금빛 삼라만상이 일상의 기억을 담은 식물의 이미지로 전환되고 화면은 연민과 그리움의 희노애락이 교차하는 풍경으로 바뀐다.

 식물과 꽃은 비유이고 은유이며 기억과 자아의 투영이다. 강렬한 금빛을 배경으로 섬세하고 다층적인 형태와 보라색의 색감은 불완전하고 사그라져 가는 인생의 성쇠와 강렬한 생의 의지를 모순적으로 발휘한다.


결혼은 달개비와 질경이로 구성된 결혼사진이다. 오래된 그러나 인생에서 절정인 옛날 사진을 식물이미지로 전환시키면서 생명과 순환, 덧없음, 그리고 살아있어서 이어지는 생명의 영속성을 느낀다. 식물 이미지는 서로 이어져서 하나로 흐르게 한다. <가족>은 부케를 들고 결혼식을 올리는 가족사진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군상을 표현하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인물에서부터 어린 조카들, 어머니와 시집 안간 누이들에 이르기까지 식물이미지로 덮인 인물초상들은 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식물의 삶처럼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희망, 존재의 영속을 꿈꾼다.

작품에 등장하는 부케들은 모두 불멸의 상징들이다. <방가지똥 부케>에서 <그녀를 위한 부케>에 이르기까지 결혼식의 주인공을 위한 부케들은 화려한 꽃이 아닌 무명의 식물들로 장식된 부케들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 태양의 강렬한 에너지를 받고 화려한 성장과 명멸, 그리고 재생과 부활을 꽃피우는 무명의 식물들은 존재의 환희요 경이인 것이다.

 


육체와 재생의 열망

이러한 환희와 열망 속에 풀로 표현된 육체와 재생의 열망은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허망, 상실과 대리만족의 재구성이다. 식물과 꽃의 이미지 가운데 금빛의 화면에서 시도했던 것은 내면의 식물로 가득한 부처의 법신인 <초상>과 수풀 속에서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지장보살과 나한을 그린 <보살과 나한>등의 작품이 있다.

식물과 꽃을 관상하는 것이 곧 부처를 관상하는 것이요 여래의 몸이 곧 빛이요 생명이므로 금빛의 찬란한 화면은 <초상>이 되고 <방동사니 부케>가 되었다.

이러한 금빛 식물의 곳곳에 중생의 고통을 함께 한 보살과 나한이 숨어 있으므로 식물과 꽃을 그리는 것은 새로운 연기와 인연에 의한 생의 열망이 강력히 숨어있는 것이다.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고 우리의 삶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자기 내부에 깃들어 있는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식물의 성장과 소멸 그리고 재생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죽음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자의 말이 아닌 자연의 관찰을 통해서 깨닫는다.

생명은 쉼 없는 운동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한한 생명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육체의 애착과 상실감은 사라질 것이다.

생명은 계속 흐르고 있다. 식물과 꽃이 그 존재를 확장시키며 신비롭게 이어지듯이 현재의 생존 속에 있는 사소한 사랑이 자기 삶을 이루고 존재의 지평을 넓힌다.

 

성민우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적인 대비, 성과 속, 세속과 초월의 다양한 관념상을 식물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생의 숭고와 환희가 금빛으로 쌓이고 기억과 자아의 다층적 색감이 강렬한 생의 의지를 발하는 화면은 모순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금빛으로 그려내는 생장과 번식의 아름다움


류철하 (미술평론가)

 

성민우는 식물의 생장과 번식의 영고성쇠를 형태와 이미지로 추출하여 표현한다.

대체로 금빛으로 그려내는 풀의 이미지는 과도한 크기와 형태의 반복, 색채의 강렬한 대비와 함께 절정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나고 죽음을 반복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의 순환처럼 시간과 기억, 사물과 사물의 공간에 대한 느낌과 암시를 통해 우리는 사물이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러나 성민우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본질현상에 대한 추구이다.

기법이나 양식의 문화적 기억을 최소화 하면서 형태의 순수성, 생장의 추상적 성격을 그려낸 그의 작업은 형태미와 조형이념에서 생명의 이상과 원형이 만나는 순간의 광휘를 화폭에 전개시키고 있다.

 

성민우는 비단에 수묵과 금분, 혹은 채색으로 망초, 돼지풀, 민들레, 질경이, 왕고들빼기 등 너무나 흔한 풀들을 금빛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히 금빛으로 그려내는 생장과 번식의 아름다움처럼 생명의 본능과 에너지를 ‘아름답다’고 하고 그 ‘아름다움’을 찰나에 보이는 금빛으로 묘사한다.

생명과 함께 죽음을 반복하고 절정의 순간을 직관한 이미지는 강렬하고 압도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금빛 이미지는 전통의 청록산수 및 금벽산수, 또한 화엄경 변상도나 벽화의 관음보살상에 나타난 강력한 이미지를 계승하고 있다.


금번 작업에서 보이는 성민우의 화면은 필선이 굳세면서도 세밀하다. 수묵과 농채를 사용하면서도 세부묘사를 확대시키고 사실적이면서도 사실을 넘어서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준법과 농담, 시각의 다채로운 바라보기를 통해 깊이를 표현한 전통의 화면 대신 평면화된 화면에 장식적이고 단순강렬한 형태와 색채를 가미해 절정의 형태감을 전달한다.

여기서 성민우가 표현하는 절정의 이미지는 청록산수 및 금벽산수의 기법과 양식전통이나 문화적 서사를 벗어나서 개인적인 시각을 이루게 되는 경험과 양식화, 형태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과도한 크기는 압도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자극한다. 형태의 반복은 그러한 이미지를 고정시킨다.

금빛이 바탕이 되는 보라색과 보색의 색채는 강렬한 대비를 이뤄 메시지를 발산한다. 형태를 더욱 뚜렷하게 하고 색채는 강렬하게 나타내는 그의 작업은 동양화 일반의 서사와 관념을 일정정도 단절시킨다.

산수에서 보이는 형태의 골격과 율동, 그 속에서의 미감체험을 시간 속에서 축적하는 전통의 동양화 관념과는 다르다.

시간의 지속을 제거하고 바라본 형상의 직관을 통해 형태미의 추상을 추출해 낸다.


성민우의 작업은 관계의 맥락이나 비유적인 이미지로부터 단절되고 현실로부터 격리된 이미지를 통해 특정한 지각인상을 나타내려하고 있다.

관습적 현실을 넘어서서 현실이면서도 초현실의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사물과 공간, 현실의 일상성과 항구성을 흔들어 놓고 관습적 사유를 탈각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양식화와 형태미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


사고의 정형성을 탈피하고 감각적 지각인상을 고도화하여 이미지의 폭발적인 힘을 제공하려는 성민우의 작업은 세대의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면서 현 동양화 공간에서 실험중이다.

그 실험이 성민우에게는 과도한 형식파괴보다는 관념과 이미지의 순수형태와 조형감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하겠다.


 

RYU Chul Ha, Curator of Woljeon Museum

 

 

SUNG Min Woo extracts the figure between growth and propagation of plants as the shape and image of those. The images of herbage drown by gold-light give the climax figures through overwhelming size, repeated shape, and color contrast. People indicate the existence of things in specific space-time with the feeling and hint of time and memory; thing and space like life-cycles through birth and death. However, SUNG observes the fundamental phenomenon in the space-time. SUNG's works do not only minimize the techniques and styles of cultural memory, but also express the purity of shape and the metaphysical characteristics of growth. The works show the impact brilliance met together ideal and original form on drawing.

 

SUNG is drawing the herbage met with everywhere using gold-light on silk with oriental ink, gold powder or coloring. SUNG says that the instincts and energies of lives are "BEAUTIFUL." and the "BEAUTY" is shown as momentary gold-light. The images are overwhelmingly appeared with repeating birth and death and intuiting climax timing. The gold-light images strongly inherit the traditional images: the traditional bluish green color painting and the Buddhist painting such as the Avatamska Sutra and the Buddhist Goddess of Mercy.

 

 

The excess of images are caused by the overwhelming size and are fixed by the repetition of shapes. The complementary color based on gold-light radiates messages with strong contrast. SUNG's works can be separated from the general narration and thought of oriental painting: that give apparent shapes and powerful coloring. The work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onventional thought of oriental painting with the flame and movement of shape seen in the conventional landscape painting. The beauty of form is extracted by eliminating the continuity of time and viewing the figure directly.

 

SUNG's works show the specific perception-images isolated from a reality, a logical connection of relationship, and a metaphor of expressions. SUNG gives the real and surreal spaces over the conventional reality. The efforts are offered by stylization and physical beauty: that shake the things and spaces; the real dailiness and constancy and that get ride clear of the conventional thought.

 

SUNG's works make the new direction of tradition and the experiment of that in the space of the oriental painting: the works give the explosive power of images with escaping the standardization of thought and upgrading the consciousness of feeling. The experiment is not the overwhelming destruction but the iterative progress of thought and image purity.

 


The Beauty of Growth and Progress Drawn by Gold-Light

 


In this exhibition SUNG's drawings are powerful and detailed. SUNG utilizes oriental inks and deep color pigments, expands to the detailed description, and expresses the real and over-real figures. SUNG transports the beauty of form: the figures and colors of decoration, simplicity, and intenseness on plated space instead of the traditional techniques expressed a stringent law, a shade of color, and various views. SUNG escapes the conventional techniques of a bluish green color painting and a golden green color painting; the cultural narration of those. SUNG seeks the individual view point achieved stylization and physical beauty.

 



 
 



풀의 초상

 

풀처럼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에너지를 크게 발산시키는 생명체가 또 있을까.


한 두 달의 시간, 우기와 건기가 재빠르게 지나가는 그 여름에 풀은 크게는 2~3m의 높이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 가지 끝에 자잘한 꽃과 씨앗들을 매달며 또 다른 여름에 피어날 생명체들을 부지런히 만들어낸다.

가을의 건조함이 시작될 때 쯤 화려했던 생명의 끝자락에서 줄기와 잎은 말라가지만 그 뿌리들은 더욱 단단히 땅에 자리를 잡는다.

겨울의 어느 날 여름의 싱싱한 몸체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 꼿꼿이 서 있던 들풀들은 내게 미이라의 모습으로 각인되어졌다.

그리고 다시 여름. 순식간에 내 키를 훌쩍 넘기며 커버린 놀라운 생명체가 무심히 너무나도 조용하게 내 앞에 있다.

놀라운 생장의 속도와 수많은 씨앗들. 나는 그것이 풀의 본질적 형상이라 여긴다.

몇 개월의 시간도 살아가지 못하는 풀들은 그 대신 그들에게 주어지는 찬란한 삶의 시간에 화려한 성장을 해나가고 있다.

무엇이 이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 여기 있소’ ‘그러나 내게 귀 기울일 필요는 없소’ 라고

자신의 존재감을 극명하게 피력해 낸다.

영정사진을 찍기엔 너무도 젊은 아이가 무덤덤히 자신을 카메라 속에 들이밀 듯이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2005년 9월 ‘풀의 초상’ 전시 작가노트



 
 


금빛풍경
 
슬쩍 지나치던 무료하기까지 하던 날이었다
바람이 불고 해가 들었다
아름답다
풍경이 바람과 인연을 맺었다
햇살과 맺은 인연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내게도 바람이 스치고 해가 들었다
그것은 찰나의 기억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잡풀들과 잎 떨어진 나뭇가지마냥
그렇게 아무 의미없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버려졌던 들판이
어느 바람에 의해
어느 햇살에 의해
무수히 빛을 내뿜는 풍경으로 내게 오듯이 
나도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빛
금빛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금빛풍경으로.
 
2005.2.15. 작업노트